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문단 편집) === 피해자 유가족의 피해 === 피해자 유가족들은 '''온 가정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김옥분의 셋째 여동생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1]]에서 인터뷰한 바에 의하면 뉴스를 보고 고향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어머니가 "지금 전화하지 마라"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그때 친정집에는 이미 헌병들이 찾아온 상황이었다. 또한 헌병들은 김옥분의 엄마와 오빠를 끌고가서 '당신 딸이 간첩이었다는 걸 실토해라', '언제 어디서 공작금을 받았는지 실토하라'며 60세가 넘었던 노모를 군화로 짓밟았다. 뿐만 아니라 그때 김옥분의 어머니가 입고 있던 코트가 공작금의 증거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내세웠다. 둘째 여동생은 남편, 3살 아들과 함께 끌려왔고 고문을 당하는 사이 가족들조차도 안기부에게 세뇌당하기 시작했다. 고통은 대를 이어 계속됐다. 간첩의 가족이라며 [[연좌제]]로 세상의 멸시를 당했고, 실제로 안기부에 연행되어 가혹행위를 수반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간첩의 가족'이기 때문에 보안감찰이라는 명목으로 안기부의 감시가 일상화되었으며, 직장과 학교에 틈만 나면 연락을 취해 행적을 캐물으며 민폐를 끼쳤고 당연히 그들이 매사에 눈총을 받게 만들었다. 당연히 유가족들은 제대로 된 일상생활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해져 직업을 가지기 어려웠고 결혼 생활도, 학교에 다니기도 힘들었으며 신분을 숨기고 연락을 끊어야 했다. 어머니는 이로 인해 [[실어증]]을 얻어 1997년에 사망했고 나머지 형제자매 5명도 고초를 겪었다. 전매청(현재 [[KT&G]])에 다니던 큰언니는 사건 직후 해고된 뒤 [[정신질환자]]가 되어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다가 그해 겨울에 타지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큰언니의 남편도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1988년 교통사고로 뇌수술을 받고 폐인이 되었다. 오빠도 주위의 비인간적 멸시 속에 술에 의지하다 2000년에 석연치 않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목격자에 따르면 '''대형 트럭이 2번이나 후진하면서 아예 깔아뭉갰다고 한다.''' 윤태식을 형사고발한 지 4개월 만의 일이었다. 여동생 4명 중 3명은 이혼당했고, 그 자녀들도 간첩의 가족이라며 학교에서 [[집단괴롭힘]]을 당해 자퇴하고 가출, 방황했다. 그중에서도 셋째 여동생이 가장 비참했다. 그 당시 그녀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김옥분이 남파공작원이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시댁 식구들이 몰려와서 언어/육체적으로 폭행하고 강제로 이혼당했다.''' 당시 3살이었던 아들은 남편이 양육하기로 했지만 그나마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남편의 가족(고모들)이 연좌제의 피해를 입을 것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남편 몰래 아이를 절에 내다버렸다.''' 바람에 아이는 8년이나 부모를 모른 채 고아 아닌 고아 신세로 살았다고 한다. 국가안전기획부와 윤태식은 아내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그녀의 가족들까지 죽음으로 몰아넣고, 가까운 친척마저 지옥으로 떨어뜨린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